지나간 외로움을 돌아보며 / 나는 컸다.
작년 한 해 내가 썼던 글들을 돌아보면 난 참 많이도 외로워했구나.
그때 나는 외롭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또 그것을 말로 내뱉기도 참 많이 뱉었다. 그 모든 지나간 감정들을 단지 남아버린 기록으로만 느끼고 있는 지금, 이제는 한 발짝 멀리서 분석이랄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여 이렇게 몇 자 써 본다.
스물 한 살의 나는 세상에 처음 나온 오리새끼 같았다. 그간 인간관계의 쓴 맛이랄지 그것의 양태랄지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주어진 반경 너머의 사람들을 접한 건 거의 처음이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 같았던 사람도 만났으니.
굳이 원인을 따져보자면, 하나는 지속되던 관계의 갑작스런 부재, 둘은 그것에 대한 치료제로 술을 먹었고 그 술이 더 많은 회한을 양산한 것(이제는 그것이 술의 속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지막은 그 혼란들 속에서 정돈되지 않은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만났던 낯선 인간들.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아주 체계적이고 강렬히 내 마음을 외롭게 했다. 물론 모두 내가 자초한 짓이다. 다만 내 마음을 속 썩인 당시 '나'의 변명이라면, 그땐 그 길 밖에는 없는 줄 알았다. 술과 새로운 사람들로 그것을 채우는 것 외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일종의 방황이랄지 자아탐색이랄지 장황한 단어들로 포장할 수 있는 시간들이다. 허나 그런 흔한 단어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고 그간 깨달은 바 많았기에 조금은 더 곱씹으며 반추할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모든 것들은 아주 서서히 술에 의해 양산되었다. 그 성분이 무어길래 인간을 그토록 바보로 만드는 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나는 그것에 한 치의 의심의 여지 없이 굴복했다. 어쩌면 그 굴복을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을 요일도 모른 채 살아갔다. 낮에는 책을 읽었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돌아온 새벽, 간간히 정신이 깨어있는 날에는 글을 썼다. 그 모든 외로움들을 토로할 방법이 그 뿐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날에는 후회할 일들을 벌였다. 아무런 연고 없는 이에게 대뜸 전화해 한 밤의 토론을 벌이기도, 마주한 적 없는 사람에 사랑을 말하기도 했다.
어떻게 운이 맞닿아 통화가 가능한 날에는 외로움이 덜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순간에 뚝- 하고 끊겨버리면 그때부터는 저 깊은 남색 소용돌이로 침잠이다. 그뿐인가. 이 세상에는 나와 이 넓은 침대만이 덜렁 남겨진 듯하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것만 같고 눈을 돌리면 보이는 저 건물들은 실체 없는 하나의 표면인 것 같다. 눈을 떠 천장을 보고 있으면 내일에 대한 기대나 감각 따위 전혀 없고 이 순간만이 영속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대로 눈만 뜨고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 여지없이 내일이라는 시간에 기대어 오늘이 찾아온다. 그때 나에게는 오늘과 내일은 아주 강력한 동일어였고 그것을 구분할 어떤 의지나 생각 따위 할 겨를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점점 다가오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지나친 고통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시체처럼 일어나면 간밤에 퍼마신 술 덕분에 속은 뒤집힐 때로 뒤집혀 무얼 삼키고자 하는 욕구조차 사라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날이 아니라 속만 뒤집힌 날은 다행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계는 정오를 가리켰다. 그러면 나는 부엌에 남겨진 음식 따위를 조금 집어 먹고는 옷을 챙겨 입고 그대로 밖으로 나간다. 어제와 똑같이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시고 책을 몇 페이지 읽다보면 제군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데 그러면 어제와 동어 반복이다. 그렇게 해가 뜨면 커피를 마시고, 해가 지면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반복 또 반복. 다시 정신은 휘갈겨진 채로 고독한 침대에 풍덩.
나의 여름은 그랬다. 간간히 여행을 하고 밀린 강의를 듣는 행위는 있었으나 제대로 한 것은 없다. 그렇게 수 개월 동안 쌓아놓은 지독한 회한들이나 절망은 풀릴 곳 없었고, 나는 그걸 삼키거나 옆에 있던 친구들에게 한바탕 분출하거나. 허나 그런 연하(嚥下) 내지 발산을 한다 한들 내일이 바뀔리는 없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이런 반복에서 끝나게 될까 두려웠고, 그래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지나친 숙취로 다시 쳇바퀴에 몸을 싯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인생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한 켠에 항상 지니면서도 똑같은 오늘을 맞이하다보니 당연히 그 고독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똑같은 곳으로 굴러가는 그 바퀴에 몸을 뺀 지금은 너무나 잘 보이지만, 당시는 무지해지는 나를 그저 보고 고독단신을 홀연히 느끼는 것 외에 어찌할 도리 없었다는 것이 내 변이다.
엄마의 도움 또는 반강제적인 개강으로 나는 가까스로 탈출했고 이제는 막연한 외로움을 느끼진 않는다.
여전히 음주를 내 의지대로 즐기는 입장은 못된다. 가끔 정신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당시 느낀 처연함의 반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이제는 알기에 술을 먹는 날은 드물다. 또 여전히 타인에게 기대거나 대뜸 전화를 해 아무 소리를 지껄이거나 가끔 어이없는 일을 벌이곤 하지만 그것이 일상이 아닌 사고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그들에게 나를 던지기 전에 나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법을 안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나는 가끔 여전히 외롭고 가끔 여전히 침잠하지만 꽤나 정상적이고 깨끗한 인간의 모양으로 가고 있다는 게 현재의 근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크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