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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게 된 건 작년 여름이었던가. 당시 사모하던 사람의 얘기를 듣다 김환기 화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제일 먼저 본 건 그의 작품보다도 아내 향안과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흑백 사진 한 장이었는데, 어쩐지 쓸쓸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그 둘의 분위기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그 경험을 계기로 환기의 그림을 하나하나 검색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작가 경매 최고가로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보다도 더 좋았던 건 아내 향안과 연애 시절부터 뉴욕에 있어 떨어져 있던 시절에까지 나누던 편지와 그 편지에 그려진 조그마한 그림들이다. 편지 속 글들은 서로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들이 너무 예쁜 우리 말로 적혀져 있었고, 아내 향안을 향한 장난스런 초상화 같이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작은 종이 한 장에 그의 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그들의 편지 사본을 수록한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구입해 읽었다. 한자어와 영어 발음 그대로가 섞인 그 시절의 편지를, 환기의 손글씨를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음미했다.
김환기라는 작가가 가진 것과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던 사람, 김향안. 서로는 둘이었기에 현재의 둘일 수 있었으며, 둘이었기에 그들의 모습일 수 있었다.
내가 김환기 화백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당시 시대의 느낌을 잘 머금고 있는 작가라 생각되어 그렇기도 하다. 모던한 근대 한국의 느낌을 그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예술가다. 그의 글들은 어쩐지 따뜻하고도 세련되었는데, 그가 향안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게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1955년 멀리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을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눈깨비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수화-
내 그림 참 좋아요. 내 예술과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애. 저 정리된 단순한 구도,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이야. 어두워졌어요.
바람이 잘 불고 볕이 쨍쨍 나서 바깥에서 무얼 하고 싶은 날이야.
어머니는 참기름을 짜시고 나는 야채밭에 갔었어. 상추를 한 웅큼 뽑아왔지. 봄 상추가 어디 가을 상추를 당할 수가 있나. 하여튼 나는 매일 먹는 궁리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밭고랑을 건너뛰려니까 이런 고려청자의 파편이 눈에 띄겠지.
아득한 옛날 이 섬에도 생활이라는 게 있었던 모양이야.
이 수염 난 친구 누군줄 아나? 아주 호남이지?
10월 27일 한낮에 보냅니다.
1974년, 수화가 예기치 않게 먼저 세상을 떠났고 향안은 그저 울며 그리워하기 보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것들을 알렸다. 그것이 그들의 대화 방법이었고 향안과 수화의 사랑이었다.
서로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완성한 것; 그것이 그 두 사람이라는 하나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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